티스토리 뷰


2월9일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일이다. 지난해 7월 동의안이 국회에 제출된 뒤 이미 두 차례나 처리가 무산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실무책임자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정책 결정은 정확한 사실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한-칠레 에프티에이 비준안을 둘러싼 국회 논의와 일부 단체들의 주장을 보면 이들의 판단이 한-칠레 협정에 대한 그릇된 인식의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어 안타깝다. 그래서 2월9일 국회 본회의 토의를 앞두고 몇 가지 기본적 사실을 다시한번 강조하고자 한다.
첫째, 1월8일 국회 본회의 논의 때 일부 의원은 칠레가 세계 3대 농산물 수출국, 또는 세계 최대 농산물 수출국이라고 하면서 이런 농업강국과 자유무역협정을 추진하는 것은 무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세계식량기구(FAO)의 2002년 통계에 따르면, 칠레는 세계 24위의 농산물 수출국가로 전세계 농산물 수출교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78%에 불과하다.

더구나 한-칠레 협정에서는 칠레 수출 농산물의 62%를 차지하는 사과, 배, 성수기 포도를 완전히 제외했다. 마늘, 고추 등 양념류와 낙농제품 등 우리 농업에 민감한 373개 품목도 일단 제외한 뒤 도하개발의제(DDA) 협상 뒤에 재논의키로 했다. 따라서, 일부 과수분야에서 피해가 우려되나 그 규모는 직·간접적인 피해까지 합쳐 10년간 최대 약 6천억원 정도로 예상된다. 결코 우리 농업에 사활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볼 수는 없는 규모다.

둘째, 많은 의원들이 정부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개방만 서두르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학자금 지원, 의료비 지원 등 농민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지원대책이 절실하다는 주장을 한다. 정부는 이미 이러한 지원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다. 정부는 한-칠레 협정에 대한 보완대책으로 예상 피해액의 두배에 이르는 1조2천억원 규모의 특별기금 조성을 주내용으로 하는 에프티에이 지원특별법을 마련했다. 이와 더불어 농어촌특별세법, 농어촌부채경감특별법, 삶의질향상특별법을 마련했고, 지난 11월11일 농민의 날에는 10년간 119조원 규모의 중장기투융자계획을 포함한 종합적인 농업·농촌 지원대책까지 발표했다. 이미 과수단체를 중심으로 한 농민단체들이 각종 보완대책을 환영하면서 비준동의안과 함께 지원방안이 서둘러 국회에서 통과돼 확정되기를 희망한다는 태도를 표시하고 있다.

셋째, 일부 의원들은 칠레가 이미 다른 나라와 맺은 자유무역협정을 두 건씩이나 파기하였던 전례를 들어 우리가 한-칠레 협정을 파기하거나 도하개발의제 협상 이후로 연기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의원들이 예로 들고 있는 칠레-뉴질랜드, 그리고 칠레-파나마 자유무역협정은 협상단계에서 중단됐다. 이미 협상이 타결돼 양국 대통령 참석 아래 서명까지 마친 한-칠레 협정과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체결된 협정은 통상적으로 6개월, 길어야 1년 이내에 비준되는 것이 상례다. 한-칠레 협정 비준이 계속 지연될 경우 우리나라의 중남미 수출에 끼치는 부정적인 영향, 우리의 개방정책에 대한 신뢰도 추락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일례로, 지난 1월29일 미국의 유력한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앤푸어스(S&P)의 고위 관계자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이 난관에 봉착한 사실을 한국의 개방·개혁 의지를 의심케 하는 사례로 평가한 바 있다.

우리 농업이 구조적 어려움 속에 개방의 파고라는 만만찮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역의존도가 70%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경제구조상 문을 닫아 걸고 살 수는 없다. 또한 개방에는 어느 정도의 피해가 따를 수밖에 없다. 우리도 그 당연한 기본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더구나 국제경쟁과 해외시장에 노출되면서 성장해온 우리경제가 아닌가. 다만, 우리 농업의 특수성에 비추어 무역자유화를 통해 창출된 재원으로 농업부문의 경쟁력 강화와 구조조정을 지원한다는 것이 정부의 확고한 정책이다. 이것 밖에는 대안이 없다는 국민적 공감대가 이미 형성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사실과 국민적 공감대에 비추어 총선 이후로, 혹은 도하개발의제 타결 이후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비준을 미루는 것은 명분도 실익도 없는 주장일 뿐이다. 실무자로서 국익에 바탕을 둔 국회의원들의 대승적인 판단과 농업인들의 이해와 협조를 기대한다.

안호영/외교통상부 다자통상국장